'유전'은 아리 애스터(Ari Aster)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현대 공포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입니다. 영화는 그레이엄 가족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다루며, 특히 가족 간의 복잡한 관계와 유전되는 트라우마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애니(토니 콜렛)는 미니어처 작가로, 그녀의 어머니가 사망한 후 가족과 함께 상실감을 처리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곧 또 다른 끔찍한 사고가 가족을 덮치면서, 그들의 일상은 점차 악몽으로 변해갑니다.
가족의 비극, 공포의 시작
애스터 감독은 일반적인 공포영화의 점프 스케어나 과도한 시각적 효과에 의존하지 않고, 인물들의 심리적 공포와 가족 구성원 간의 긴장감을 통해 관객에게 깊은 불안감을 전달합니다. 영화의 첫 부분은 마치 가족 드라마처럼 천천히 전개되며, 각 인물의 복잡한 심리 상태와 관계를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특히 애니와 그녀의 딸 찰리(밀리 샤피로) 사이의 복잡한 관계, 그리고 애니와 아들 피터(알렉스 울프) 사이의 미묘한 갈등은 이후 전개될 공포의 심리적 기반을 탄탄하게 다집니다.
영화의 전환점이 되는 충격적인 사고 장면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관객을 강타하며, 이후 영화는 더욱 어둡고 기이한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애스터 감독은 이 사고를 통해 가족의 붕괴와 함께 초자연적 공포가 서서히 일상에 침투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단순한 놀람이 아닌 지속적인 공포와 불안감을 선사합니다.
유전되는 트라우마와 가족의 숙명
'유전'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공포의 요소로서 '유전'의 개념을 효과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입니다. 영화는 가족 간에 전해지는 정신적 질환, 트라우마, 그리고 어두운 비밀들이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탐구합니다. 애니의 어머니인 엘렌은 생전에 비밀스러운 의식과 기이한 행동으로 가족을 괴롭혔으며, 이러한 어두운 유산은 애니와 그녀의 자녀들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특히 영화는 모성에 대한 양가적 감정을 섬세하게 다룹니다. 애니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복잡한 감정과 함께, 자신이 어머니로서 자녀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깊은 불안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미니어처 작품을 통해 가족의 일상을 재현하며 일종의 통제감을 얻으려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점점 더 통제력을 잃어갑니다.
영화는 또한 정신 질환의 유전적 측면을 암시하며, 애니가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적 불안정성이 자녀들에게도 이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표현합니다. 이러한 '혈통'의 개념은 영화 후반부에 드러나는 초자연적 요소와 결합하여,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숙명적으로 이어지는 가족의 어두운 운명을 암시합니다.
의식과 상징으로 가득한 공포의 세계
'유전'은 단순한 공포영화를 넘어, 풍부한 상징과 의식으로 가득 찬 복잡한 서사를 구축합니다. 영화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애니의 미니어처 작품들은 단순한 직업적 설정을 넘어 중요한 시각적, 상징적 장치로 기능합니다. 이 미니어처들은 실제 가족의 삶을 축소하여 재현하며, 때로는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을 암시하는 예언적 기능을 합니다. 특히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그레이엄 가족의 집 미니어처는 마치 인형의 집처럼 인물들을 담아내며, 그들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조종되는 듯한 느낌을 강화합니다.
또한 영화는 오컬트적 의식과 상징을 효과적으로 활용합니다. 애니가 참석하는 심령술 모임에서 만나는 조안(앤 도우드)은 애니에게 죽은 가족과의 소통 방법을 알려주며, 이후 영화의 초자연적 요소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계기가 됩니다. 벽과 천장에 새겨진 기이한 상징들, 찰리가 만드는 기괴한 인형들,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의식적 요소들은 모두 그레이엄 가족의 비극이 단순한 우연이 아닌 계획된 의식의 일부임을 암시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드러나는 충격적인 진실은 개인의 의지와 자유의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이처럼 '유전'은 가족 드라마, 심리적 공포, 그리고 오컬트적 요소를 절묘하게 결합하여 복잡하고 다층적인 공포 서사를 구축합니다.
정교한 연출과 연기로 완성된 현대 공포의 걸작
'유전'의 가장 큰 강점 중 하나는 정교한 영화적 기법과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력입니다. 파블로 라토르의 카메라 워크는 때로는 미니어처를 클로즈업하고, 때로는 인물들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포착하며, 관객에게 불안감과 공포를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특히 롱테이크와 슬로우 줌을 활용한 장면들은 긴장감을 고조시키며, 어두운 집 안의 공간들은 마치 미로처럼 느껴져 관객에게 심리적 압박감을 선사합니다.
콜린 슈테츠의 음악 또한 영화의 불안한 분위기를 강화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단조롭고 반복적인 선율과 함께, 때로는 갑작스러운 불협화음으로 관객의 신경을 자극합니다. 이러한 기술적 요소들이 모여 '유전'은 단순히 놀라게 하는 공포가 아닌, 관객의 심리 깊숙이 침투하는 불안과 공포를 창출합니다.
무엇보다 '유전'의 가장 큰 강점은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입니다. 토니 콜렛은 애니 역할로 생에 최고의 연기를 선보이며, 심리적 붕괴와 공포에 휩싸인 여성의 모습을 설득력있게 표현합니다. 특히 애니가 가족 비극 후 겪는 트라우마와 공포, 그리고 점차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정신적 혼란 상태를 표현하는 콜렛의 연기는 영화의 심리적 깊이를 더합니다.
'유전'은 단순한 공포영화를 넘어 가족의 비극, 트라우마의 대물림,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심오한 질문을 던지는 작풉입니다. 아리 애스터 감독은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연출력과 스토리텔링 능력을 보여주며, 현재 공포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초자연적 공포를 다루지만, 그 이면에는 상실, 죄책감, 그리고 가족 관계의 복잡성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아리 애스터는 이후 '미드소마(Midsommar)'를 통해 또 다른 형태의 심리적 공포를 선보이며 자신만의 독특한 공포 세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습니다. '유전'은 그 출발점으로서, 단순한 오락을 넘어 인간 심리의 어두운 측면과 가족 관계의 복잡성을 탐구하는 진지한 예술 작품으로 공포영화의 역사에 깊이 각인될 것입니다.